이성혐오와 분간 안되는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혐오하는 재미를 위해 필요악을 핑계삼는 사람도 있고 진심으로 어쩔 수 없다는 사람도 있고 복잡하다. 스쳐지나가듯이 본 인터뷰(아마 보복성 음란물 관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서 한 활동가는 "그럼 어떻게 해야했던 걸까요?"라는 반문을 했다. 그렇다고해서 부작용, 특히 무고한 사람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짊어지겠다면?
물론 그 짐의 무게를 과소평가했을 수는 있지만 무엇이 '과소'이고 무엇이 '과대'란 말인가? 현실은 그렇게 딱부러지지않는다. 전 법무부 차관 불법출국금지 의혹사건이 전격 기소로 이어진 게 어제 일이다. 악인을 응징할 때도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자는 말은 분명 옳은 태도지만 원 사건을 무혐의처리한 집단이 행동에 옮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혐의 처리했던 사람들이 감옥에라도 갔다 온 줄 알겠다. 버닝썬 사건의 후속처리가 못마땅했을 수는 있지만 하다못해 다른 사건을 이용하는 성의정도는 있을 줄 알았더니 철판깔고 정면돌파다. 하도 농담하나 싶어서 서로 미리 말 맞춘 거 있나 싶을정도다.
어쨋든 페미니스트 활동가라고 모두가 자신의 과격행동이 옳다고 생각한 건 아니며, 자기가 생각해도 선 넘었다 싶으면서도 요즘 말로 어그로 끌기 위해서, 관심받기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이야기다. 노동문제로 바꾸면 더 이해하기 쉽겠다. 평화로운 노조시위가 관심받지못하는 걸 기자에게 이야기하자 '그럼 가스통들고 뛰세요 ㅎㅎ'고 답변받았다는 한 노동운동가의 회고가 있었다. 물론 그 답변이 꼭 특종을 따기위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하지않다. 기자가 잡담분위기서 반쯤 농담삼아 던진 말일 수도 있고, 과격한 것에만 관심갖는 현실에 냉소를 보내기위해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렇게 페미니즘은 과격화되었지만 원래 이런 과격성은 '취급주의'다. 어거지로 끌어올린 열기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사회전방위적으로 탄압받진 않았다. 이전시대 성차별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던 기성세대 남성들이 많았다. '여성이 받던 마지막 제도적 성차별' 호주제가 없어진 게 2008년으로 불과 12년 전 일이었다. 그래서 미투운동이나 성폭력/성희롱 처벌운동이 생사람잡는 부작용이 터져도 어찌저찌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수명이 좀 더 길어졌을 뿐 부작용이 누적되면 파탄에 이르는 건 순식간이다. 특히 정치인을 타겟으로 하는 미투운동은 터뜨리는 쪽이 정교하지못하면 순식간에 역풍으로 돌려받는다. 이건 선출직들의 직업특성 때문이다. 평소에도, 특히 선거기간에 각종 의혹이나 안좋은 소문으로 공격받는게 정치인들이다. 의혹이나 소문들이 사실이면 괜찮지만, 허위인 것들도 있다. 그래서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미투는 미투운동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다.
놀랍게도 이 높은 난이도를 극복한 사례가 나왔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이었다. 오거돈 시장 사퇴 발표는 2020년 4월 23일로 21대총선 불과 일주일 뒤였다. 그 덕분에 이 문제는 정치쟁점화되지않았다. 왜냐하면 의혹을 제기한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으려했다면, 21대 총선 선거기간 중 터뜨리는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공표된 건 총선 이후였다. 양 측이 접촉한 건 총선 이전부터 였다고 하니 피해자가 정치쟁점화되길 원치않았다는 설명에 힘이 실릴 수 밖에 없었다.
운도 따랐고 대리인들도 유능했다. 무엇보다도 정치쟁점화되기 싫다는 당사자 의사가 잘 반영되었다. 일단 민주당 대승으로 끝난 21대 총선 결과는 의혹제기한 입장에선 행운이었다. 하도 역사적인 대승이라 부산시장 하나쯤이야 수준이었다. 대리인들 능력도 좋았다. 이미 총선 전에 비공식 접촉을 할 능력이 있었고 어찌나 보안을 잘 유지했는 지 사퇴 당일 사퇴가 평소 지병인 위암때문이지않겠느냐는 추측성 기사까지 있었다. 결국 당사자 의사대로 정치적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작년 12월 검찰과 정부여당 갈등이 한창일 때 검찰이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추가영장을 신청하고 그게 기각되었다는 걸 대서특필하는 일이 있었는데 피해당사자 허락은 받고 했는지 모르겠다.
하도 일처리가 좋아서 그랬던건지 야당 측에서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사전인지 의혹까지 제기했었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하더라도 비난받을 일인가? 이렇게 처리되지않았으면 의혹제기한 쪽이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치쟁점화되길 원하지않는다는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가 있었던 게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 박원순 전 시장 사건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여성의원들이 피해자 호칭을 피해호소인으로 바꿔서 욕퍼먹은 거야 쌤통이긴했다. 무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섣불리 범죄자로 낙인찍으면 안된다는 호소와 경고를 무시하더니 정작 자기들이 공격받을 땐 잽싸게 태도를 바꾸었다. 거기다 유출과정이 발표될 때까지 경찰이 억울하게 의심받고 욕먹었다. 하지만 성추행 혐의 피소 사실을 유출한 행동 그 자체가 공격받는 건 의외였다. 3개월 전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례도 있었고 소장제출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그들의 피소사실유출은 의혹을 제기한 측이 정치적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오거돈 사건에서조차 정치적 악플공세를 모두 피할 순 없었다. 그토록 대리인들이 유능했고 운도 따랐는데도 말이다. 앞서 말했든 정치인들은 선거기간 중 각종 음해에 시달린다. 때문에 의혹을 제기한 측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많이 받게 된다. 오거돈 사건 때도 악플공세를 다 피할 순 없었는데 박원순 전 시장 사건이 알려진 이후 어떻게 흘러갈 진 뻔한 것 아니었겠는가?
여기다 의혹제기를 맡은 대리인 측이 기름을 끼얹었다. 피해자라고 안부르고 피해호소인이라 부르면 '2차 가해'라는 말을 대중 앞에서 했다. 정치색채가 없는 사람한텐 자기 생각에 증거가 충분하다 싶으면 피해자고 아니면 피해호소인일 뿐이다. 증거가 더 필요하다, 또는 자기가 궁금하니까 증거를 더 내놓으라고 압박하기위해 일부러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쓴 대중들을 2차가해자로 만든거다. 이 검열 짓거리에 남성이나 야권지지자만 기분이 나빴을까? 참고로 안희정 성폭력 사건 때 정무비서 쪽에서 악플에 법적 대응을 시사하자 여초 커뮤니티들이 술렁였다. 막장 드라마 주 시청자층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페미니즘이 끝물이라는 신호는 이번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일부 여성계에선 보궐선거 치르게 된 계기가 묻혔다고 한탄하던데 재건축 한 번 풀리면 수 억원을 벌 수 있는데 굳이? 그나마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박원순 사건에 또다른 확증이 나오냐 정도였고, 나머지 여성계의 주장따윈 당연히 관심 받지 못했다.
지금이 페미니즘 전성기였다면, 이러니저러니해도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다시 결집했었을 것이다. 은근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번 선거엔 '최초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타이틀이 걸려있었다. 특히 경쟁자가 오세훈 후보다. 이번 선거에서 박영선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하면, 오세훈 후보는 본의아니게 최초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탄생을 3번이나 저지한 정치인이 된다.
하지만 여론조사 블랙아웃까지 반등은 일어나지않았다. 박영선 후보 개인의 이미지가 시장직과 맞지않은 것도 있다. 국회의원과 달리 지금까지 최초 여성광역자치단체장이 탄생하지못한데엔 유권자들이 시장이나 도지사에 따뜻함보단 빡빡한 이미지를 원하기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그래서 성깔있어보이는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 서울시장에 등판하지않을까 싶었지만 구치소 감염사건이 터지면서 아웃되었다. 확실히 박영선 전 장관은 추미애 전 장관에 비해 억센 이미지가 없다.
반대편에서도 강성 페미니즘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다. 앞부분에서 '성차별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던 기성세대 남성들'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 문구에 딱 부합되는 사람이 바로 오세훈 전 시장이다. (82년 김지영 관련 발언이나 여성주차장 정책 등) 이런 사람이 참여연대가 각 후보에 성평등 질의서를 보냈을 때 답변거부를 때렸다. 그리고 이준석 뉴미디어 본부장은 여기에 "시대착오적 여성주의"라는 평을 내렸다. 참여연대가 LH사건을 터뜨리고, 그 덕에 이 보궐선거구도가 뒤집혔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웃긴 장면이었다. 어쨌든 최소한 오세훈 캠프는 강성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레디컬 페미니즘 측에서 이 흐름을 뒤집기에 코로나 19는 너무나도 큰 벽이다. 항상 요맘때 쯤이면 여성이 임금을 많이 못받느니하면서 피해의식 자극시키는 기사가 올라오곤 했었지만 지금 그런 얘기꺼내면 이상한 취급 외엔 받을 게 없다. 분명 통계상 여성들이 코로나 19에 경제적 피해를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언택트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면서비스 업종이 엄청난 피해를 받았는데 해당 업종에 여성들이 많이 일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정도 피해일 때 이야기다. 자영업자들이 문닫는 수준인데 여성들만 힘들어요~하면 누가 귀기울여줄까?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도 한몫했다. 잊을만하면 여성계가 한 번씩 단체로 으쌰으쌰하면서 인맥만들고 조직력 과시하고 소속감부여하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그런게 없다. 야권은 문재인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지만, 사회적거리두기로 정치집회가 막힌 건 야권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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